존재 이전을 사유하기 또는 공상하기

국립전주박물관 기획전시 <아주 특별한 순간 – 그림으로 남기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소개된 전시를 보기 위해 온 가족이 즉흥적으로 떠났다. 어마어마하게 덥고 밝은 날씨. 그와 대조되는 서늘하고 어둑한 전시실. 이곳저곳을 누비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17-19세기 조선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다.

자기 인생의 시작과 함께 세계가 시작되고, 죽음과 함께 세계가 종료된다고, 자기 이외에는 전부 게임 속의 NPC와 같다고 정말로 믿던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세계관의 문제지만, 막상 진흙탕 토론을 시작하면 결론지을 수는 없는 토픽. 결국 그의 오만을 꺾기 위해 내가 아득바득 주장했던 건 “이 세계의 과거나 미래가 나만을 위해서 새로 구축된 것이라고 치기엔 … 너무도 복합적이고 아름답다” 였다. 나만큼이나 지혜롭고 감수성이 풍부한 수천만 수억의 존재들이 나 이전에 우당탕탕 살았고 이후에 우당탕탕 살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삶의 기록들.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가 마음에 남는다. 방문 바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나 빼꼼 내다보는 서민들, 나룻배를 타고 새 평안감사를 구경하는 사람들, 그 나룻배를 노로 젓는 사람들, 강 양쪽을 횃불로 밝히는 갓들, 댕기머리들, 꼬마들, 물동이를 진 여인들, 흔들리는 깃발. 흐르는 사람들. 이 역동적인 그림의 모든 요소들이 내 삶 이전에도 수많은 삶들이 있었음을 지시한다. 그들은 어떤 존재와 어떤 세계를 상상했을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었을까?

나의 탄생 이전 순간의 흔적들이 다 구축된 거짓이고, 이 세계의 주인공은 나라고 믿는 건 물론 자유다 – 아직도 완결적인 반박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그냥 안 찾으련다 – 하지만 그런 세계관의 삶은… 너무도 납작하다. 그렇게 결론 없는 이야기에 하나의 말꼬리 덧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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