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잔영: 후쿠이 겐이치와 로얼드 호프만

두 명의 ’여섯 명 중 한 명’: 1981년 노벨 화학상

1981년 10월 19일, 두 명의 노벨 화학상 공동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양쪽에 있던 이들, 일본 교토대학의 후쿠이 겐이치(福井謙一, 1918-1998)와 미국 코넬대학교의 로얼드 호프만(Roald Hoffmann, 1937-)을 향한 언론의 온도차는 컸다. 발표 다음날 요미우리 조간신문1은 1면 최상단에 검은색 음영을 덧입힌 표제로 “노벨 화학상에 후쿠이 겐이치 (교토대학) 교수”를 내걸었다. 뉴욕타임즈2도 1면에 수상자들의 사진과 함께 수상 발표 기사를 게재했으나, 이는 최상단 헤드라인이 아니었으며 호프만은 표제에 등장하지 않았다. 호프만은 1981년 한 해 노벨상을 수상한 여섯 명의 미국인3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후쿠이는 당시까지의 노벨상을 수상한 총 여섯 명의 일본인 중 한 명4이었다: 물리학상 세 명, 평화상 한 명, 문학상 한 명을 이어 아시아 첫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후쿠이는 미국의 노벨상 독점을 저지하며 새롭게 성장하는 “일본에의 기대를 증명”5하는 사례로 주목받았다.

대조적인 것은 두 수상자의 국적과 대중의 관심뿐만이 아니었다. 후쿠이와 호프만의 생애는 학문 내외를 불문하고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후쿠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으며6, 그의 학부 전공과 박사 졸업논문은 모두 탄화수소를 다루는 공업화학 분야였다. 호프만은 폴란드 출생의 미국 이민자로,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독일 거주 경험이 있으며 분자 오비탈을 다루는 화학물리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7. 후쿠이의 탄화수소 연구는 2차 세계대전기 총력전 하의 교토제국대학에서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호프만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1년 이상을 게토에서 생활하다 탈출했다. 그들은 “화학 반응의 경로에 관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론”8, 즉 후쿠이의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과 호프만의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두 이론은 서로 모순되는 가정 위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발표 연도의 차도 10년이 넘고 두 화학자는 공동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다.

알프레드 노벨은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 또는 발전”9 을 이룩한 화학자(들)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서로 모순되는 이론이 어떻게 “동등하게” “중요한” 발견일 수 있나? 애초에 한 문제에 대한 모순되는 두 답이 모두 “발견”이 될 수는 있나 — (1) 한 이론만이 옳고 다른 이론은 틀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복수의 이론들이 정당할 수 있다면, 그 착상들이 (2a)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고 (2b) 그럼에도 서로 들어맞지 않는 형태를 갖게 된 경위 역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이론이 정당한지 판별할 기준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는 복수정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학과 ‘법칙’에 기반한 이론과학은 환원주의에 기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음 (1)과 (2)에 답하기 위해 환원주의가 덜 강력한 정치, 경제, 철학, 심리 등으로 눈을 돌린다.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복잡한 계는 더 단순한 계들의 기계적 결합’이라는 환원주의를 벗어날 수 있다면, 주어진 문제의 답으로 단 하나의 이론만이 옳다는 신념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2) 그리고 어떤 과학자가 이론을 설계하는 데에는 그 과학자의 과학관, 나아가 철학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은 당대 사회의 정치경제에 영향을 받는다.

이 글을 통해 나는 후쿠이와 호프만의 상이한 전쟁 경험이 두 개의 서로 모순되지만 정당한 오비탈 이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1) 오비탈은 더 이상 임의적 근사 없이는 구축할 수 없는 가장 작은 복잡계로서, 21세기에도 그 “존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 나는 STS학자 브루노 라투르가 제기한 유동적 존재론을 적용해 두 이론의 대상이 기실 서로 다른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겉보기의 모순을 해결한다. (2) 총력전과 디아스포라라는 극단적으로 다른경험을 거친 후쿠이와 호프만은 각각 실용주의와 변증법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각각 ‘프론티어(최전선)’과 ‘에너지 배리어(언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이 사고의 흐름을 촉진한 것은, 줄곧 전쟁의 언어로 유비되어 온 유기화학 전통이다.

전선과 능선

유기화학은 진격과 퇴각이라는 전쟁의 유비가 돋보이는 분야다. 거대한 분자가 엉키듯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무기화학이나 고분자화학과 달리, 유기화학의 반응식에서는 두 분자의 충돌이 전면에 부각된다: 유기화학자들은 목표target 분자의 약점을 공략할 특수한 분자를 설계한다. 그 분자는 가려진hindered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하는데attack, 전자는 화살표arrow로 지정된 메커니즘mechanism의 경로를 따라 분자 속을 헤집는다. 유기화학자들은 수십 단계의 합성 전략strategy을 계획하고, 분자의 특정 부분을 보호하며protecting group, 보호되지 않은 부분을 방출한다leaving group. 반응물과 생성물이라는 두 진영 사이의 갈등 결과, 한쪽으로 평형이 쏠리면서 지배적인dominant 화합물이 형성된다. 내가 강조한 단어들은 모두 유기화학 교과서10의 일상 용어에서 가져왔다.

후쿠이가 스스로의 이론명을 ‘프론티어frontier 오비탈’로 지은 것 또한 이 경향의 일환이다. 1950년대 초반 후쿠이가 자신의 이론을 처음 미국 학계에 발표할 때, 프론티어라는 단어는 “결정적인” “공격하는 반응물” “공격에 취약한”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11. 후쿠이의 아들은 “나의 아버지가 미국사의 “프론티어”에서 그의 이론을 따온 건 잘 알려져 있다”라고 회고한다12.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은 가장 경계에 가까운 오비탈이 반응을 주도한다는 이론으로서, 격변과 최첨단이라는 ‘최전선’의 함의를 십분 이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후쿠이의 ‘프론티어’는 19세기 미국의 경계 확장에 따른 원주민 추방, 인종 갈등, 민족 정체성의 혼합과 같은 복잡한 역사13를 무시한 낭만화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경계와 같은 세부사항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오비탈 자체가 화학자들에 의해 잠정적인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 정당한가’의 문제가 교란되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전자가 ‘질량과 전하를 가진 구형의 입자’라는 뉴턴적 세계관은 20세기 초반 슈뢰딩거 방정식과 불확정성의 원리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전자는 보른 해석에 따라 특정한 모양과 에너지로 핵 주변에 퍼져 있는 ‘구름’이 되었다. 게다가 닐스 보어의 상보성은 전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고 주장하면서 종이 위에 전자의 모양을 그릴 수조차 없게 했다: 이론적으로, 전자는 핵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거리라도 극히 조금의 확률으로나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표준적 화학 교과서는 전자가 존재할 확률이 90%인 등고면을 오비탈의 모양으로 임의 상정한다. 당연하게도 이같은 임의성은 화학자들이 다루는 계가 점점 복잡해질수록 중첩되고, “현실”과의 연결은 점점 희석된다: 완벽한 수학적 기술이 가능한 계는 원자핵 하나와 전자 하나로만 이루어진 “수소 원자” 뿐이다. 수십 개의 전자가 돌아다니는 분자의 “오비탈”이라는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뭉뚱그림이 불가피하다14. 그러므로 오비탈은 인간이 나름대로의 근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게 만든 잠정적 개체다.

그렇다면 오비탈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저 상상의 모델일 뿐인가? 상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전자라면 후쿠이와 호프만의 이론이 동시에 옳을 수는 없다. 그리고 후자라면 후쿠이든 호프만이든 제3자든 스스로의 공리계에 기반한 오비탈론을 각기 제시할 수 있다. 현대 화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은 ‘오비탈은 모델’ 이다: 그 가장 간명한 이유로는 기저basis의 문제가 있다. 길쭉하게 생긴 3개의 p 오비탈은 설정해 준 “축”에 따라 공간 상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는데, 축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임의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분자 안에서 원자핵의 위치가 고정되어 축의 가능성이 제한된다면, 그리고 결국 오비탈의 분포로부터 전자의 밀도를 유추해낼 수 있다면, 오비탈이 ‘실재’한다고 볼 수도 있을까? 1999년 네이처에 발표된 Zuo 등의 논쟁적 논문 “d-오비탈 구멍의 직접적 관측”15에 대한 화학철학자 셰리 등의 반론16은 근사적 계산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주조해낸 개념이 실제로 ‘관측’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7.

전자의 관측 가능성에 대한 기술적/철학적 논의가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비탈 문제의 모순을 우회하는 내 논의의 전제를 짚겠다: 나는 ‘실제’와 ‘모델’의 이분법을 탈피해 논의해야 한다고, 그리고 계속되는 타협 속에서 모든 ‘모델’의 ‘실제성’은 요동친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분자’ ‘중력’ 등은 일종의 ‘모델’이면서도 곧 ‘실제’로서 사회 속에서 기능하고, 과학자들의 일련의 행위로 인해 그 신뢰성—곧 실재성—은 강화와 약화를 반복한다. ‘블랙홀’ ‘힉스 입자’ ‘후성유전’ 등은 줄곧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실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명/창조/고안되어 온 것이다: 실험실 민족지 STS 연구를 진행한 라투르과 울가의 <실험실 생활>의 분석대로, “유효함과 거짓됨이라는 인식론적 특질”은 곧 “사회학적 요인”18이며, 모든 “대상들”은 과학자들의 행위에 의해 “구축”19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특정 모델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이나 모든 모델이 허상일 뿐이라는 주장이 의미를 잃는다. 여러 실험 결과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더 견고한 설명력 — 그러므로 점점 더 강한 ‘존재’를 — 갖게 되며, 하나의 결과를 설명하는 ‘꽤’ 정당한 이론이 유일할 필요는 없다20.

그러므로 1950-60년대에 “노-메커니즘no-mechanism”21이라고 불린 유기화학의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가정으로부터 구축한 호프만과 후쿠이의 이론은 모두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유기화학에서는 합성뿐만 아니라 합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메커니즘mechanism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학자들은 작용기들이 붙고 떨어지는 가능한 순서들을 조합해 모든 가설들을 만든 뒤, 각 가설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실험들을 수행해 가능성들을 하나씩 배제해 나간다. 이에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유일한 가설이 그 반응의 표준적인 메커니즘으로 공인된다. 특정한 고리 모양 ‘방향족’ 분자가 일으키는 반응, 그리고 차후 딜스-알더Diels-Alder 반응으로 알려질 육각형 분자의 형성 반응은 당시 상상 가능한 모든 메커니즘의 후보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보였다. 용매의 영향도, 특정한 중간 물질도 없어22 아무런 부분적 단계 없이 ‘한 번에’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 반응들의 사례는 계속 쌓여 갔지만, 당시의 이론적 체계에서 이 반응에 적합한 메커니즘은 없었다.

후쿠이가 1952년에 미국 학계에 처음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을 발표하고23 2년 뒤 더욱 구체적인 정식을 제시했을24 때 그가 “노-메커니즘”의 직접적 사례를 다룬 것은 아니었다25. 그는 화학 반응 일반에 대한 이론을 추구했고, 가장 활성이 있는 전자의 밀도만이 곧 반응성으로 연결된다는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을 제시했다.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에 따르면, 분자에서 가장 떨어지기 쉬운 전자의 구름과 분자에서 가장 전자가 붙기 쉬운 (아직 비어 있는) 구름이 있는 분자 내의 특정 부분에서 반응이 일어난다. 전자(HOMO26)와 후자(LUMO27), 즉 프론티어 오비탈들은 원자핵에 더 강하게 붙들린 다른 오비탈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는다는 가정28 아래에서 반응을 주도한다. (프론티어 전자가 아닌) 붙들린 전자는 음전하로서 원자핵들의 양전하를 단순히 중화한다. 음전하를 띤 붙들린 전자끼리는 서로 반발하며, 두 분자에서 상대적인 양전하와 음전하는 서로 끌린다.

후쿠이에게 중요한 것은 3차원에서의 구체적인 위치였다: ‘프론티어’라는 이름처럼, 반응의 ‘최전선’에서 분자들이 맞닿는 위치와 모양을 그려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물론 전자는 구름처럼 퍼져 있고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지만, 가중치 평균에 의해 분자 내에서 강한 활성을 보이는 부분을 특정할 수 있고 또 특정해야 한다29고 믿은 것이다. 80년대까지 이어진 그의 후속 연구30는 분자 속 각 원자핵의 ‘영향력’에 따라 3차원 공간을 분할하여, 가장 활성이 높은 원자 주변의 구름을 지목하려 했다. 동시대 유기화학 현장에서 그 후속 연구의 흔적까지 찾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은 유기반응성을 예측하는 가장 간단한 오비탈 이론으로서 지금도 애용된다.

그러나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은 간단한 만큼 많은 비판31을 수반했다: 왜 HOMO와 LUMO만이 반응에 관여하고, 나머지는 반응에 영향을 미칠 수 없나? 채워진 오비탈끼리 서로 반발한다면, 애초에 두 분자가 가까워지는 것이 넌센스 아닌가? 그리고 HOMO의 전자가 다른 분자의 LUMO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 중의 불안정한 전이 상태는 어떻게 기술되어야 하나?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이 1969년 우드워드와 호프만이 앙게반테 케미에 발표한 고전적 논문, “오비탈 대칭의 보존”32이다.

“예외. 그런 거 없다!”33 73쪽에 달하는 대규모 논문에서 우드워드와 호프만은 담대한 주장을 펼쳤고 그 유효성은 오래 지속되어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이라는 이름까지 붙게 했다.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은 반응 중간의 전이 과정에 주목한다: 두 분자가 가까워지면서 전기장은 계속해서 변하고, 이에 따라 각 분자의 오비탈 에너지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리고 반응물의 오비탈은 완전히 ‘해체된’ 뒤 생성물에서 ‘재조합’ 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과정에서 오비탈들이 대칭성을 유지하면서 생성물의 오비탈로 점차 재배치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에너지 그래프의 ‘언덕 높이’가 가장 낮은, 즉 가장 ‘덜 불안정한’ 지점을 통과하는 경로가 선호된다. 이 구도에서 HOMO와 LUMO는 굳이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고, 모든 전자가 ‘반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이 예측하는 결과와 대부분 일치한다.

(우드워드와34) 호프만에게 중요한 것은 통일성이었다. 그들의 구도에서, 비슷한 연결성을 가지는 다양한 분자들은 하나의 간단한 ‘모델 분자’로 사상된다. 복잡한 군더더기가 제거된 모델 분자에 대해서는 모델 오비탈을 상정할 수 있고, 모델 오비탈의 최적화 경로가 복잡한 분자의 반응 경로와 같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에서는 대칭성을 기준으로 반응물과 생성물의 오비탈들이 에너지 그래프 상에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로 만들어지는 에너지 장벽barrier이 만드는 능선을 전자들이 ‘타고 올라가’ 에너지 장벽의 ‘꼭대기를 넘어서는’ 게릴라전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복잡한 분자와 모델 분자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에 호프만은 isolobalism35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1년 그의 노벨상 수상 강연36은 89개에 달하는 분자들의 사례로 isolobalism을 설명한다.

전쟁의 구도 속 유기화학의 세계에서 후쿠이와 호프만은 각각 인간이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형태로 양자역학의 복잡한 논의를 근사했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후쿠이의 “최전선” 유비는 오비탈보다 전자에게 존재론적 중요도를 더 실어 주었고, 3차원 공간 속에서 분자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위치를 특정지으려 했으며, 점진적 변화보다는 일회적 적시타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우드워드와 호프만의 “능선” 유비는 전자보다 오비탈의 변화를 중시한다: 구체적인 분자의 구조보다는 그것을 간단화한 모델을 상정했으며, 오비탈의 에너지가 한계를 점차 넘어서는 ‘과정’을 추적하려 했다.

그래서 누구의 이론이 (더) 옳은가? “(프론티어) 오비탈”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isolobalism으로 연결되는 분자들은 정말 서로 비슷한가? 전자와 오비탈은 어떻게 다른가? 혹은 이런 질문들이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인가? 프론티어 오비탈과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은 동시대 유기화학 연구 현장에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이 “더 일반적인” 것이고, 프론티어 오비탈이 “더 실용적인” 이론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늦게 발표된 호프만의 논문은 후쿠이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으나, 그들의 전제는 서로 다르다: 후쿠이의 틀에서는는 전자가 오비탈들을 “갈아타는” 반면, 호프만의 시각에서는 전자가 “탑승한” 오비탈 자체가 변화한다. 후쿠이의 내부 전자들은 서로 반발하지만, 호프만의 내부 전자들은 대칭성이 다르면 전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보았듯 누구의 이론이 ‘궁극적으로’ 더 옳은지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론이 ‘현재로서 더 견고한지’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현재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이 더 견고하나 “예외는 없다”라고 단언할 수 정도로 확고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Seeman은 오비탈의 모양뿐 아니라 “부호”, 즉 위상phase에 우드워드와 호프만이 처음 주목했기 때문에 법칙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이 위상에 주목했기37 때문에 폭발적인 사례들이 구체적으로 한 번에 설명되면서 위상에 주목한 오비탈 연구 프로그램의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분자 간 유비에 기초한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은 극단적인 경우를 포섭하지 못한다: 전자 밀도가 극단적으로 불균형한 경우, 우드워드-호프만에 위배되면서 후쿠이의 이론이 적용되는 사례가 2021년 발표되었다38.

연설과 연극

1981년 노벨 화학상의 수상자 강연에서는 완전히 다른 삶의 경로를 거쳐 온 두 화학자의 성향을 비교할 수 있다. 강연은 연설과 연극의 성질을 동시에 띠고 있다고 할 때, 후쿠이의 강연에서는 연설적 성격이, 호프만의 강연에서는 연극적 성격이 돋보인다. 후쿠이는 스스로의 학문적 여정, 최근의 성과와 전망을 정리하고 “양자 화학도, 그것이 화학인 한, 전술한 경험 화학을 촉진하는 데에 유용해야 한다”39라고 선언했다. 반면 호프만은 자신에게 노벨상을 안긴 법칙을 세세하게 다루지 않고 isolobalism을 테마로 분자들을 나열하며 “설명을 구축하는 재주, 과학에서의 미학의 중요성”40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삶의 경로 역시 연설과 연극으로 응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상 이후 일본화학회 회장을 맡기도 하는 후쿠이는 “인간의 미래와 과학기술”41 “과학기술 사회와 인간”42 등의 주제로 수많은 글을 쓰고 연설했다. 호프만은 <Oxygen>과 <Should’ve> 등 과학을 주제로 한 희곡들을 썼으며, 8권의 자작시집 단행본을 출판했다43.

그들의 이론이 다른 형태를 가진 이유를 그들의 삶의 궤적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후쿠이의 ‘연설적’인 실용주의와 호프만의 ‘연극적’인 미학이 그들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에 기여했음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각 화학자들의 철학에 2차대전기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음 또한 보인다. 이를 위해 나는 전쟁을 시작점, 각각의 이론을 끝점으로 하는 사회-사상-이론 연결고리의 서사를 순서대로 구축한다. 총력전 체제 하에서 후쿠이는 산학협력의 중요성과 실용주의를 터득했다. 후쿠이의 실용주의는 곧 ‘일반을 특수에 적용한다’라는 목표에 따라 분자의 가장 반응성이 높은 구역을 특정한다는 목표와 연결되었다. 유대인 박해 속에서 많은 국가를 떠돈 호프만은 결국 미국에 정착하며 민주주의와 변증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미국 학부의 교양교육 전통 안에서 예술사 과목에 매료된 그는 특수한 분자들을 관통하는 간명한 질서를 얻으려 했고 이는 대칭성에 기반한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으로 연결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과학을 수용한 일본의 초기 양자역학과 유기화학은 구미를 극복하겠다는 경쟁적 과학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오카모토(2011)는 일본인이 제시한 이론들이 구미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여겨져 일본인 연구자들은 “일본국의 위신”을 위해 전투적으로 몰두했고, 특히 2차대전은 “그(구미 세계와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지금부터 우리나라의 과학은 우리나라 스스로가 창조”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음을 보인다44. 마지마 리코真島利行가 처음 구축한 일본의 유기화학 역시 구미로부터 수용한 이론적 틀을 일본의 특수한 사례들에 그대로 적용하는 천연물 화학으로서, “철저하게 실험을 중요시하고, 이론이나 가설에 대해서는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45.

그러므로 어린 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후쿠이에게 “수학을 좋아한다면 화학을 해라” “응용을 하려면 기초를 해라”라며 응용화학과로의 입학을 유도했던 교토대 응용화학 교수 키타 겐이츠喜多源逸의 미스터리한 제안46은 후쿠이의 마음 속에서 오래 공명했다. 응용 과학에 굳건한 수학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그의 목표는 대학생활과 2차대전을 거치며 강화되었을 것이다: 전쟁기 징병을 피할 수 있었던 20대 중반의 후쿠이는 대신 1941년부터 43년까지 일본군 연료 연구소로 차출되어 전쟁 연구를 수행했다47. 이와 연결된 후쿠이의 박사학위논문은 “화학공업장치의 온도분포에 관한 이론적 연구”로, 원통형/열교환형/외부냉각형 반응탑의 모양에 따른 온도 분포를 차례로 기술하고 있다48. 즉 1951년 후쿠이가 교토대학의 교수직을 얻어 독립적인 연구실을 차리기 전까지, 그는 쓸모가 있는 화학, 현장에서 쓰이는 화학을 추구해 온 것이다. 후쿠이는 교수가 된 뒤에야 자신의 연구에 고도의 수학을 마음껏 적용해 반응 이론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 다음 해에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쓸모와는 유리된 ‘과학 자체를 위한 과학’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응용 가능성, 더 넓은 과학자 집단에의 수용 가능성은 후쿠이의 연구 내용과 방법론 모두를 가로지르는 원리였다: 니시무라(2007)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표된 199개의 후쿠이 특허를 분류하며 고도 성장기 일본에서 “후쿠이가 프론티어 궤도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특정 테마로 수많은 기업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기업이 갖고 있는 니즈나 자금과 같은 소스를 이용하여, 연구 매니지먼트”를 수행했다고 주장한다49. 프론티어 이론 발표 후에도 후쿠이는 산업과 직결된 응용 화학 분야, 즉 고무, 시멘트, 염료 등의 고분자 연구를 진행했다50.

수학과 응용을 동시에 진행하며 응용이 수학과 연결될 지점을 탐색한 후쿠이의 연구 궤적은, 전체를 부분에 유효하게 적용한다는 실용주의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는 양자역학과 전자기학의 일반적인 성과를 매우 구체적인 두 분자의 충돌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공리들 사이에 모순이 있더라도 과감히 그것을 끌어안고 가야 하고, 가장 큰 반응성을 갖고 있는 특이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짚어 내야 한다. 사변적인 오비탈 논의를 최대한 지양하고, 공간 속 모든 점들에 수치화할 수 있는 전자 밀도를 중심으로 이론을 진전시켜 양자화학적 배경이 거의 없는 실험화학자들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가장 반응성이 높은 전자에 모든 중요도를 몰아 주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므로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은 그 이름이 과시하는 발전 지상주의뿐만 아니라, 공간 상에서 타겟을 정하고 가장 중요한 전자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정한다는 실용성의 측면에서 ‘후쿠이적’이다. 애매한 요소를 배제하고 실무에 필요한 논의를 간결하게 제공한다는 그의 과학관은 “조용하고 느긋하며 겸손하고 상냥한” 그의 개인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성격이 불러일으키는 “옛 일본 정신의 분위기”와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51. 보편을 특수에 적용하여 올바른 것을 추구한 그의 정신은 화학의 “복잡함으로 인해 생기는 선택의 즐거움이라는 묘미”52를 상찬하며 미래 과학자들이 “자기 억제로 ‘자유’를 지키”53기를 요청한다. <과학과 인간을 말한다> <화학과 나> <학문의 창조> <교육에의 선언> <21세기 일본의 선택> <철학의 창조> 54와 같은 거대 담론이 담긴 저서를 다수 출판한 후쿠이는 그야말로 일본 화학의 명료성과 실용성을 지탱하는 ‘프론티어’55로 기능했다.

로얼드56(당시 그의 아버지는 호프만이 아니라 힐렐 사프란Hillel Safran이었다)는 유대인이다. 193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나치의 폴란드 점령기, 부모와 함께 게토에 격리되어 4살부터 6살까지를 보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에서 2차 세계대전은 특히 비극적인 시기다. 유대계의 외모와 혈통, 심지어는 과학 분야까지 나치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대계 독일인들이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성과를 올리자, 나치 정권은 이론물리학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며 비난하고 실험물리학을 상찬했다. 전쟁 당시 로얼드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학문적 편견의 영향은 크게 받지 않을 수 있었겠으나, 대신 그의 정신세계는 극단적으로 흔들렸다: 계획하던 반란이 발각된 로얼드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고, 생존한 로얼드와 그 어머니는 로얼드가 7살부터 12살이 될 때까지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성이 호프만으로 바뀐 로얼드가 마지막 망명지인 미국으로 건너온 12살 때, 영어는 그의 여섯 번째 언어였다. 수많은 나라를 옮겨다닌, 그를 비롯한 대다수 유대인들은 삶에서 일관성이나 통일성을 도저히 상정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나 발터 벤야민 등 당대 독일-유대계 지식인들의 입장과 흡사하게, 호프만의 자서전에서 확인되는 두드러지는 특징은 아이러니와 변증법이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는 제목부터 드러나듯 이분법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과학 속 규범과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노력”57을 포착한다.

호프만의 변증법—과학과 예술의 관계 탐구,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대한 관심—은 교양과목이 중시되는 미국의 학창시절을 거치며 점점 증폭되고 구체화되었다. 그는 노벨상 측에 제출한 전기에서 학창시절의 교양과목이 그를 “거의 미술사 전공으로 바꿀 뻔”58할 정도로 이끌었다고 술회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동등한 행위자 사이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 그리고 환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창발하는 아름다움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120쪽) 이자 “창조적인 예술가”(211쪽)인 화학자들은 자연적/비자연적 사이의 “구별 자체를 항상 부정”(332쪽)하면서 “창조”(197쪽)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59. 그러나 창조된 화학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때로 화학은 “이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세상”(38쪽)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예술은 “인간적이면서도 지극히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95쪽)이자 “강렬하고 집중적이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95쪽) 이라는 점에서 과학연구와 유사하다60.

호프만은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식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고 그들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화학 논문을 쓸 때보다 훨씬 공들여 만드는 시61의 주제들은 과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그가 공동집필한 연극 <산소>62는 18세기 화학혁명기 산소의 “발견”을 둘러싼 화학자들 간의 논쟁을 주제로 하여 최초 발견권을 둘러싼 과학과 정치/윤리63의 변증법을 탐구한다. 특수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억지로 해소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호프만의 변증법은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의 “종합synthesis”을 합성synthesis으로부터 찾아낸다. 그에게 있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과 논리”는 창조 또는 신물질 합성의 단계에서 “종합”을 이룬다64.

따라서 호프만의 과학-예술 변증법은 연구의 일상 속에서도 작동했다. 그에게 연구의 가치는 개별적인 분자들 사이를 사변적으로 관통하는 ‘아름다운 통일성’에 의해 결정된다.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에서 ‘아름다움’은 대칭성으로부터, ‘통일성’은 분자 간 유사성을 전자의 배열로 환원하는 isolobalism으로부터 드러난다. 그의 구도 속에서 오비탈들은 스스로의 대칭성을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반응물과 생성물의 오비탈들은 하나씩 짝지어진다. 그는 후쿠이와 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복잡성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형태로 변환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정들이 도입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재조직된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엄밀하게 정의할 수도 없지만 화학에서는 환상적일 정도로 유용한 개념들”65은 ‘아름다운’ 대칭성의 세계 안에서 정합적으로 작용해 그가 “예외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게 했다.

나는 지금까지 두 화학자의 삶 속 경험, 특히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인생관이 그들의 서로 다른 이론의 발표로 연결될 수 있음을 논했다. 그렇다면 그 특수한 경험들은 이론이 만들어지는 데에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하는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나의 이론을 혼자 고안한다는 것은 20세기의 과학 현장에서 불가능에 가까우며,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의 형성에 있어 우드워드의 역할,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의 형성에 있어 후쿠이의 교내 세미나 ‘강좌’(講座kōza)66 참여자들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 경험이 이론과 완전히 무관한 것 또한 아니다. 후쿠이와 호프만은 각기 상대방의 이론적 경로를 따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쿠이에게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의 전제들은 너무 복잡했고, 호프만에게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은 너무 임의적이었다.

잔영: 1998년 후쿠이의 사망, 호프만의 부고

후쿠이 겐이치는 1998년 8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네이처에 기고된 그의 한 쪽짜리 부고67의 저자는 호프만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두 수상자 간의 개인적인 친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쿠이와 호프만은 수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공동 연구를 수행한 바가 없다. “재능 있는 후쿠이의 졸업생들 4명이 나와 포스트닥을 한”68 것만이 호프만이 언급한 후쿠이와의 연구 측면에서의 연결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연구 방향, 개인적 성격, 취미 모두에서 두 화학자는 큰 차이를 보였다. 오히려 1964년 오비탈 이론에서 생긴 접점을 두 인생의 예외적인 교차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두 화학자는 2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 수학과 검도를 좋아한, 진중하고 건실했던 소년 후쿠이는 스승이 정해 준 그의 사명을 따라 연구에 임했다. 후쿠이에게 있어 과학은, 마치 그가 총력전 아래에서 곧바로 군대에 제공해야 했던 연료 연구처럼, 실제적이고 간명한 결과를 내야 하는 학문이었다. 어영부영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 과감하게 결론을 내리는 후쿠이의 성격은 ‘프론티어 오비탈 이론’을 만들어 냈고, 노벨상 수상 이후 사망하기까지 후쿠이는 과학자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분명한 선언을 이어 갔다. 한편 매 순간 생존의 위기에 맞닥뜨려야 했던 섬세하고 활기찬 소년 호프만은 과학 역시 불확실한 세상 속의 불완전한 활동임을,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학문임을 알아 갔다. 불화하는 것들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것들 간의 차이와 다른 것들 간의 공통점을 찾아 간 그의 변증법은 대화, 연결, 그리고 대칭성에 기반한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을 낳았다. 올해로 87세를 맞은 그는 여전히 코넬대학교에서 프랑켄슈타인69, 시뮬레이션70, 기초학문-응용학문 간 긴장71 등 다양한 관심사를 발표하고 있다.

유기화학의 전장에서 프론티어 오비탈과 우드워드-호프만 법칙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잘 작동하는 두 개의 무기로서 지금도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내가 이 글에서 보이려 한 개인적인 궤적이나 이론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된다. 호프만이 누구인지, 후쿠이가 누구인지 모르고도 두 오비탈 법칙을 유기화학 반응에 적용해서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개인사와 사회사가 삭제되고 이론의 정제된 구조만이 동시대 연구와 교육에 사용되고, 또 그런 식의 과학이 꽤 잘 작동하고 있다면, 과학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나는 과학사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서 현장 과학에도 대체 불가능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믿는다. 견고한 이론도 사실은 일종의 모델이자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방식 중 하나임에도, 과학의 교육과 현장 연구에서는 가장 잘 확립된 모델을 유일한 정답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모든 모델은 다른 형태를 가질 수도 있었다: 후쿠이와 호프만의 인생 경험은 여러 번 굴절되어 이론에 반영되었고, 만약 그들이 다른 경험을 했거나, 다른 과학자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또 다른 형태의 오비탈 이론이 현재 표준으로 공인될 수도 있었다.

과학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인간 역시 계속해서 과학을 주조해 나가고 있다. 1950-60년대에 과학자들의 무의식에 흐르고 있던 전쟁의 강렬한 경험은 그들의 이론에 녹아들어 지금도 교과서의 곳곳에서 그 잔상을 드러내고 있다. 확고한 위치도 정해지지 않아 마치 오비탈처럼 흐릿하게 퍼져 있는 다양한 잔영들을 포착해 낸다면, 앞으로 과학이 전개될 방식들에 대해서도 다채롭고 구체적인 상상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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