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과제연구 기말보고서
2025년 6월 20일
공일환 (2023-21502)
과학학과 석사과정 (과학사 전공)
1 . 서론
기계가 인간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가진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내고 있다. 2022년 콜로라도 주 전람회에서 제이슨 알렌(Jason Allen)이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 미드저니(Midjourney)에 프롬프트를 입력해 생성한 작품이 수상했는데,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알렌은 “형씨, 예술은 죽었어. 끝났어. AI가 이겼어. 인간은 졌고.” 라고 말했다고 한다.(Ivanova 2025) 기계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분야의 대표인 예술이 궁극적으로 기계에게 ‘잠식’ 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정치·법률·학문·노동 등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여겨진 다양한 분야도 잠재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다.
AI의 예술 침투에 대한 인간의 러다이트적 반발은 노동집약적 작업이 필요한 만화나 영상예술 분야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AI 예술 반대자들은 AI를 사용한 예술이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AI의 산물이 비윤리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을 주장하며 AI 사용에 대한 보이콧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같은 AI 예술에 대한 저항감에는 사실 여러 문제들이 섞여 있다. 가장 크게는 원리적으로 기계의 산물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범주적 문제’와 기계가 인간에 대한 적절한 보상 없이 예술적 성과를 훔친다는 ‘윤리적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논쟁을 더욱 생산적으로 해결하고 기계의 바람직한 활용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서는 AI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감의 구성 요소를 뜯어보고 분석적으로 타개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그 가장 기본적인 쟁점으로서, 특정한 요건이 갖춰졌을 경우 (이론상) 기계의 산물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기계가 어떤 경우에도 예술을 생산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은 기계가 성취할 수 없는 기계와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상정하며, 예술을 구획하는 요인이 그 본질적 차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계가 획득할 수 없는 예술의 ‘인간적인’ 본질을 상정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은데, 예술 창작과 향유에 있어 기계와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포착하기 어려울 뿐더러 기계가 굳이 침탈하려 하지 않더라도 동시대의 예술에서 내재적 본질을 상정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창의성·창조성(creativity), 독창성(originality), 미(beauty), 모방의 핍진성(verisimilitude) 등 예술 여부를 판가름하고 그 완성도를 평가할 수 있는 예술의 본질적 필요충분조건은 없다. 20세기 초 이래 마르셀 뒤샹의 변기 <샘>을 비롯한 아방가르드 작품, 앤디 워홀의 팝아트,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대지미술, 개념미술 등 모더니즘 이후의 작품들은 작품이 미적 속성을 보유해야 한다거나 감상자에게 미적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가정들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럼에도 어떤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거나 모든 작품이 동등한 예술적 가치를 가지는 ‘무엇이든 가능한’ (Anything goes)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마약, 토스터, 자동차 등은 아무리 예쁘게 디자인되거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해도 예술로 여겨지거나 미술관에 전시될 수는 없다. 또 미술전람회는 프로페셔널 예술가와 아마추어 예술가의 작품들을 다르게 취급하고, 많은 경우 출품작 중 일부에게만 영예가 있는 상을 수여한다. 그렇다면 (좋은) 예술에 대한 가치 평가의 가능성을 온존시키면서도 예술의 ‘인간적’·내재적 본질을 상정하지 않는 예술규정을 모색할 필요가 있고, 이 규정이 잘 만들어졌을 때 기계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한다면 기계의 산물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넘볼 수 있다.
이 글은 20세기 이후의 분석적 예술철학이 예술을 구획함에 있어 예술의 내재적 본질 관념을 폐기하고 도달한 ‘예술세계’라는 제도적 접근을 논증적으로 재구성하고 기계가 충분히 발달할 경우 예술세계 제도에 소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내적 본질이 없으므로 예술의 정의 자체를 포기·유보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어떤 작품이 제한된 용적의 미술관에 전시될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예술 구획의 기준을 실천적 차원에서 요청한다. 미술관, 큐레이터, 예술가, 관람객 등이 꾸려 나가는 ‘예술세계’는 지금까지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며 대상들의 예술 여부를 평가해 왔는데, 기계가 예술세계에서 행위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능동자(Artistic Agent) 또는 예술적 수동자(Artistic Patient)로서 예술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시민권의 자격요건을 명료화하고 기계가 이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테스트의 종류를 제시함으로써, 적절한 기술적 발전과 인간과의 제휴를 통해 기계가 예술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술세계 내에서 인간과 기계에게 완전히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 이에 나는 기계의 심의 결과를 인간이 숙의를 통해 승인하는 양원제 형식의 예술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한 반박에 대응한다.
2. 예술세계의 시민권
2.1. 관계적 접근의 한계
AI 철학자 코켈버그(Mark Coeckelbergh)는 철학적 미학과 기술철학의 논의를 조합하여 “기계가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가?”(Can Machines Create Art?) 라는 질문이 상정하는 ‘기계’ ‘예술’ ‘창조’의 세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Coeckelbergh 2017) 코켈버그는 예술의 예술로서의 가치가 작품 제작 과정과 그 결과 중 어느 한쪽에 독점적으로 위치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과정과 결과가 상호 의존적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고, 예술의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예술 현장의 판단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포착한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기준이 작품에 선행한다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작품의 감상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적·현상학적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해당 작품의 예술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관계적 접근’을 제안한다.
이론 이전에 경험이 있다는 관계적 접근은 예술 조건에 과도한 제약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물을 예술로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사회적·제도적 맥락으로부터 유리되어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면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조건이 감상자에 과하게 의존하는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현재의 예술인식은 아마추어의 작품이나 어린이가 만든 작품이 모종의 가치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술관·콘서트홀 등의 제도적 상연장에서 전시되는 프로페셔널 예술(소위 ‘고급예술’ high art)은 아마추어 예술과는 질적으로 다른 예술적 지위를 작품에 부여한다. 또한 감상자의 자격조건을 없애고 누구라도 대상과 예술적 관계를 맺을 경우 그 대상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결국 미와 예술에 대해 ‘무엇이든 가능한’ 상대주의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미술 작품을 개인적 차원에서 생산·공유·향유하는 것 너머에서 예술제도와 예술사가 공인하는 제도적 예술에 진입할 최소한의 조건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제한적인 시공간적·재정적 여유를 갖고 있는 미술관 등의 예술제도가 전시에 적합한 작품을 선별하여 바람직한 예술 감상의 장을 만들어 나갈 기준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특정한 작품만을 예술로 인정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그 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제도의 예술 기준을 모색한다.
2.2. 창의성과 예술조건은 별개
예술을 판정하는 기준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크게 본질주의(essentialism)와 규약주의(conventionalism)으로 나눌 수 있다. (Ivanova 2025: 2) 재현성, 표현성, 메시지, 대칭성 등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 그 작품의 예술 여부를 결정한다는 본질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계가 예술을 생산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유효한 기준은 전에 없던 새로움을 창출하는 역량인 창의성이다. 보덴은 창의성을 조합적 창의성·탐색적 창의성·변형적 창의성으로 세분화하고 기계가 특정한 종류의 창의성을 가질 수 없다고 보면서, 기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창의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Boden 2014)
그러나 코켈버그가 예술의 표현론과 모방론을 대조하면서 세계와 독립된 예술가 주체의 예술 ‘창조’가 전자의 전통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본 것처럼, ‘창의성’이 예술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될 수 없음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예술철학에서 많이 논의되어온 예술 ‘창의성’의 반례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1964)인데, 워홀은 수세미 브랜드 ‘브릴로’의 포장지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 나무로 만든 상자의 겉면에 칠해 전시했다. 심지어 그 나무상자 역시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목수를 시킨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예술을 전시하기 위해 실제 세계로부터 독립한 어떤 대상을 창조했다거나 그의 내면적 창의성을 발휘했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이미 60년 전부터 예술에서 인간의 독창적 창의성은 필수조건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보덴이 던지는 ‘기계는 창의적일 수 있는가?’의 질문과 코켈버그 식의 ‘기계의 산물이 예술이 될 수 있나?’라는 질문은 아무런 상호 함축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워홀의 작품을 예술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워홀 이후로 수없이 등장한 팝아트, 개념예술, 대지미술 등 인간의 창의성과 무관한 작품들을 모두 기각하게 되어 동시대 예술의 작동과 심대한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브릴로 박스>를 예술로 인정하는 경우, <브릴로 박스>를 포함하는 예술의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브릴로 박스>는 미국의 분석 예술철학 전통으로 하여금 예술의 기준을 작품 내가 아니라 작품이 유통되고 해석되는 외적·사회적 요인으로부터 찾는 규약주의적 방법론으로 이행하게 했다. 이 방향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예술철학자는 아서 단토(Arthur Danto)와 그의 사상을 발전시킨 조지 디키(George Dickie)다. 이들은 예술이 해당 작품을 둘러싼 ‘예술세계’1 (Artworld)의 승인을 통해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주장한다. 예술사회학자 김동일은 예술세계 개념이 “예술적 현상과 실천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본질론적 원전성(originality)이라는 폐쇄된 회로 밖으로 확장시켰다”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는데, 이때 원전성은 “예술의 본질을 예술의 영역 내부에 두려는 모든 시도”다. (김동일 2009: 108)
예술세계 개념은 작품의 바깥에 있는 사회·언론·관객이 특정 사물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예술 바깥의 존재가 예술과 관계맺는 방식은 대부분 해석을 통해서인데, 단토에 따르면 “무엇인가가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는 순간 그것은 어떤 해석에 지배되게 된다. [⋯] 최소한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예술이 일종의 언어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말하는 사람과 그리고 대상을 해석할 수 있고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규정할 수 있는 해석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Danto 1987: 62, 김동일 2009: 117에서 재인용) 해석을 위해서는 (1) 작품에 선행하는 예술이론과 (2) 이론과 작품을 연관지을 수 있는 추론 능력이 필요하다. 즉 단토의 예술세계는 예술이론을 선행하는 작품들로부터 추출하고, 예술작품을 선행하는 이론들과 연관짓는 이론-작품-이론-작품-⋯ 의 느슨한 연쇄2로 변화한다. 단토의 예술세계는 작품들 사이에 이어지는 연관 사슬을 거치면서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와 흡사”(양종회 2009: 172)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
사회학자들은 분석철학 전통에 있는 단토와 디키가 결국 예술의 내적 요소를 통한 정의를 포기하고 사회적 제도로 옮겨온 것이 예술을 다루는 데에 있어 사변적 철학과 경험적 사회학이 분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본다. “전통적으로 예술을 사회와 대립해서 보는 경향”(양종회 2009: 187)이 사회와 유리된 창조적 천재의 관념을 공고히 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성격을 무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자율적 예술’의 종말과 그 환상을 해체하려 한 예술가들의 작업이 “예술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을 더 이상 유용하게 할 수 없도록 변했”(양종회 2009: 188)다고 예술사회학자 양종회는 본다. 즉 지금까지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학’의 영역이라며 주목받지 못한 부분까지 포섭한 예술이론이라는 점이 예술세계론의 중요한 성취다.
2.3. 예술세계의 작동 방식
예술세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단토에 의해 ‘예술세계’ 개념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 단토에게 예술세계 개념은 실체적 형태를 지니지 않은 담론에 가까웠다. 이 예술세계 개념을 발전시켜 미술관, 예술가, 관객, 언론 등 “실체적인 요소”(김동일 2009: 132)가 참여하는 제도로 정식화한 것은 조지 디키다. 디키는 예술세계가 “형식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며, “예술은 인공적”이라고 주장한다. (양종회 2009: 175) 디키는 예술세계의 구성요소와 작동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정식화한다.
첫째, 예술작품은 예술계의 공중에게 제시되기 위해 창조된 종류의 인공물이다.
둘째, 예술가는 이해를 통해 예술작품의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셋째, 공중은 어느 정도 그들에게 제시된 대상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성원들인 사람들의 집합이다.
넷째, 예술계는 모든 예술계 시스템의 총체이다.
다섯째, 예술계의 시스템은 예술가에 의해 예술계의 공중을 향한 예술작품의 제시를 위한 준거틀(framework)이다.
(Dickie 1997: 92, 김동일 2009: 121에서 재인용)
디키는 예술가와 공중 각각에게 두 가지 특징 또는 능력을 요구한다. 예술가는 “첫째, 전시를 위해 창조된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둘째, 예술을 창조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예술적 테크닉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청중은 “하나는 그들에게 전시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아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술을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과 감수성”을 가진다. (디키 1998: 111-112, 양종회 2009: 176에서 재인용) 디키는 예술가, 예술작품, 예술세계가 그 자체로 확고한 정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순환적으로 정의하는 “굴절된 개념들(Inflected concepts)”(양종회 2009: 177)임을 인정한다. 이는 예술세계가 자의적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는 한계를 갖지만, 이는 한편으로 기계 등 예견하지 못했던 요소들을 유연하게 포섭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디키의 예술세계 규정과 현행 예술세계의 양상을 고려했을 때 기계는 예술세계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기계는 예술세계의 구성원임을 보증하는, 적절히 고안된 ‘시민권’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3. 기계에 대한 예술세계 시민권 심사: 두 경로
우선 디키가 예술계의 구성원으로 ‘사람’을 지목할 때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는 특징을 상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정의에 있는 ‘사람’ 규정을 일반적인 ‘개체’로 보자. 이때 하나의 예술계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서 행위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개체는 ‘예술가’와 ‘공중’이다.3 예술세계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둘 모두의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으며, 예술가 또는 공중 중 하나의 자격만을 충족하면 된다. 예술가는 예술을 생산해 예술세계에 제출하므로 편의상 예술적 능동자(Artistic Agent, AA), 공중은 제출된 예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므로 예술적 수동자(Artistic Patient, AP)라고 부르자.
디키의 정식화에서 잘 드러나듯, 기계가 예술가 또는 공중이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이해’ 조건이다. AA가 되기 위해서 기계는 기존의 예술계 시스템이라는 준거틀을 ‘이해’한 뒤 예술작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AP가 되기 위해서 기계는 예술계 안에서 예술가에 의해 제시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AA와 AP의 경우에 각각 해당하는 ‘이해’의 수준은 다르며, 후자를 위한 ‘이해’가 더 강력한 기준인 것 같다. 각각을 이해(AA)와 이해(AP)로 표기하기로 하자. 나는 기계가 이해(AA)를 구현한다면 현행 예술세계 시스템에서 인간과의 협업을 통해 AA가 될 수 있으며, 이해(AP)가 구현될 경우 협업 없이 독자적인 기술 발전을 통해 충분히 AP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경로 중 어느 것도 기계를 예술세계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을 저지할 수 없다.
3.1. 예술 창작자 (Artistic Agent)
현재 예술세계는 자신의 작품 제작 의도나 원리를 해명할 수 없는 어린이나 동물에게 예술 창작자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물론 ‘현대예술과 구별불가능한 어린이 그림’이라는 주제가 유머로 소비되고 있지만, 어린이의 작품이 실제로 제도권 예술에 자리잡지 못했음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므로 디키의 예술세계 규정에서 어린이와 동물이 AA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그 생산물이 ‘예술’로서 소비되도록 의도되었음에 대한 이해(AA)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AA)의 요소를 구체화하고 기계가 이해(AA)를 보유할 수 있음을 보인다면 기계는 AA로서 예술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 디키의 입장을 재조직해 보면,
{AA1} AA는 기존의 예술들에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고,
{AA2} 그 예술들에 활용된 ‘예술적 테크닉’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AA3} 그 테크닉에 대한 이해(AA)를 통해 작품의 제작에 참여해야 한다.
AA1 조건은 쉽게 달성할 수 있다. 미술관·박물관 등 제도권 예술이 지금까지 전시·보관해 온 작품의 목록을 확보해 그 작품들에 ‘예술’ 태그를 붙여 학습시키면 된다. AA2는 조금 까다로운데, 이 ‘예술적 테크닉’이 다소 자의적인 기준으로 불명확하게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은 모두 세계를 재현하는 구상예술로 묶일 수도 있지만, 각각 르네상스 미술과 팝아트 미술이라는 시대적 사조 구분으로 분화될 수도 있다. 결국 이 예술적 ‘테크닉’과 ‘사조’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본질적 기준은 없거나 포착하기 어렵다고 할 때, 결국 특정한 존재가 AA2를 만족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일종의 예술사조 튜링 테스트를 수행하는 것이다. 현재의 AI는 인간 예술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훌륭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반 고흐 스타일’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 ‘수채화 느낌’ 등 특정한 ‘예술적 테크닉’을 사용하여 작품을 생성하라는 프롬프트에 대해 ChatGPT나 미드저니 등의 도구들은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보이고 있고, 앞으로 더 정교한 성과를 산출할 것이다.
AA3은 이해를 활용하여 산물을 생성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인지 (인간·기계를 불문하고) 완전히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기계가 이 조건을 만족한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ChatGPT가 ‘반 고흐 스타일의 아이폰 17’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 고흐 스타일에 대한 (AI 나름의) 이해(AA)’에 바탕해 만들어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난점은 기계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인간 예술가가 ‘큐비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큐비즘에 대한 패러디 작품을 만들었을 때 예술세계는 그 작품이 예술가의 큐비즘 이해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 예술가에게 작품의 제작의도를 물은 뒤 그 답을 바탕으로 예술세계가 예술제도에서의 전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을 생성한 AI가 그 작품의 제작 원리나 의미를 (작품 제작 사후적으로) 충분히 용납 가능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AI는 AA3를 만족한다. AA1-3을 만족하는 기계는 이해(AA) 역량을 보유한다.
기계가 AA1-3을 모두 구비해 이해(AA)를 확보하고 한 번 기계가 AA로서 예술세계 내에 자리잡는다면, 이후의 기계가 생산한 예술은 최초 기계가 만든 예술체계에 ‘접속’함으로써 자동으로 AA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이 기계의 예술세계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례에 호소하며 기계가 만든 예술이 무엇이든 예술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예술적 협력(collaborate) 사례가 축적되고 있는 현 예술세계의 작동 방식을 고려했을 때, 인간과 기계를 완벽히 구분해 후자를 배제한다는 방법은 작동하기 어렵다. (Coeckelbergh 2017: 297)
지금 예술계가 공인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은 모두 이전의 예술계가 공인하는 예술조건에 의거하고 있다고 할 때 (디키의 다섯 번째 기준), 역사적 접근을 통해 예술의 정의를 마련하려는 월튼(Kendall Walton)에 따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술이 아닌 것으로부터 기인했지만 이후 예술들의 최초 준거가 되는 ‘프로토(원형)-예술체계’를 지목할 수 있다. (Stecker 2010: 110) 프로토-예술의 주 목적·기능은 예술적이지 않더라도, 이 프로토 예술체계에 준거해 이후의 예술체계가 발달하는 경우 이후 예술들에서는 ‘예술적’ 기능이 부각될 수 있다. 기계가 독자적으로 생성한 사물은 이전의 예술세계의 산물과 아무 연계도 맺기 어려우므로 ‘프로토-예술’로도 기능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협업 산물이 예술적 가치를 부가적인 것으로 가지는 프로토-예술로서 예술세계에 입장할 경우, 이 프로토-예술체계에 접속하는 이후의 예술들이 기계의 ‘비중’을 점점 높여 간다면 궁극적으로 기계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성한 작품이 예술세계의 작품 목록에 등록될 수 있다.
3.2. 예술 수용자 (Artistic Patient)
인간의 예술세계가 기계의 AA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계는 예술에 대한 유효한 평가와 비평을 제시함으로써 AP로서 예술세계에 소속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디키의 규정에서 AP는 역시 그 앞에 놓인 대상을 예술로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의 이해(AP)가 무엇인지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가령 고양이나 카메라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의 시각장을 포착하고 피해 가거나 재현할 수는 있어도 예술의 수용자가 되기 위한 이해(AP)는 결여한다. 이해(AP)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AP1} AP는 대상 X가 예술임을 식별할 수 있다.
{AP2} AP는 다양한 감수성을 사용하여 예술 X를 예술로서 “감상”/”경험”한다.
{AP3} AP는 자신의 이해(AP)결과(“감상”)를 발화하여 타자의 예술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 여부를 구분하는 AP1은 AA1보다 더 강력한 조건이다. 기존에 예술로 공인된 작품들을 예술로서 인지할 것을 요구하는 AA1과 달리, AP1은 전에 학습되지 않은, 처음 보는 감각 데이터의 예술 여부를 판정할 수 있을 것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의 예술 이해에 따라 변화하는 예술계의 예술 조건을 고려했을 때 AP1을 완벽하게 달성하는 것은 인간과 기계 모두에게 불가능한 요구다. AP는 예술 조건을 가르는 완벽한 기준을 탑재하지 못하더라도, 당대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대다수의 AP와 비슷한 기준으로 예술과 비예술을 구획하여 대상 X를 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AP1을 달성한다. 적절한 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코미디언>을 감상자가 예술로 구분해 내는 것인데, <코미디언>은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로 미술관의 벽에 붙인 작품이다. 대다수의 감상자는 벽에 붙은 바나나를 예술로 인정하고 그 바나나를 먹거나 떼어버리지 않지만 동물들이나 어린이들이 이 작품을 먹지 않고 예술로서 보호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2019년 행위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David Datuna)가 이 바나나를 의식적으로 떼어 먹었지만, 이것은 다투나가 AP로서가 아니라 AA로서 행위한 결과다.) 예술 감식에 대한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적용해 학습되지 않은 감각 데이터가 주어졌을 때 인간 AP만큼이나 적절한 예술작품 구획을 이루어낸다면 기계가 AP1을 만족한다고 볼 수 있다.
AP2는 고전적인 예술 관념을 가진 감상자의 입장에서 기계가 AP가 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된다. 인간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오성과 감성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예술적 감상을 수행하지만, 감정이나 자의식이 없는 기계는 이같은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일으킬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인간은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기계는 미적 경험을 할 수 없다’라는 두 가지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전제에 기대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술을 향유하는 경험을 다소간 낭만화·신비화한다. 디키는 예술을 감각하는 특수한 ‘미적 태도’가 있다거나, 일반적인 경험과 본질적으로 다른 감성적 ‘미적 경험’이 있다는 주장이 현대 예술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면서, 비어즐리(Monroe Beardsley)의 미적 경험론이 “정감적 국면들만 너무 강조하고, 아무런 감도 일으키지 않은 미적 경험, 혹은 냉담한 미적 경험을 무시”(양종회 2009: 174)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AP는 <브릴로 박스> <샘> <코미디언> 등의 개념예술을 예술로 감상하면서 정서적 감동을 느끼지는 않는다. 현재의 예술세계에서 예술을 감상 및 경험한다는 것은 일상생활과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 경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X를 예술로 인식하고 X가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을 수용·처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AP2는 오히려 낮은 수준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카메라도 달성할 수 있는 아주 쉬운 기준이다.
AP3은 개인적 향유를 위해 만들어진 예술과 예술세계 제도가 공인한 예술을 분리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공중은 새롭게 제시된 예술을 개인적으로 감상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작품을 (좋은) 예술로 승인할지를 비평이나 설문을 통해 결정함으로써 예술세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AP3은 예술 여부에 대한 튜링 테스트를 요구하는 AP1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데, AP3은 AP로 하여금 X가 예술임을 기술적으로(descriptively) 판정하는 것뿐 아니라 X가 왜/어떻게 예술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설명을 제출(explanatory)하고 다른 AP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동일에 따르면,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것이 “예술적 지평 위에서 해석되어졌기 때문”(김동일 2009: 118)이라고 본다. AP들이 참여하는 예술잡지, 제도권 미학, 큐레이터 커뮤니티 등의 ‘예술적 지평’이 <브릴로 박스>에 대한 설명적 해석을 제공하고 공론화함으로써 <브릴로 박스>를 예술세계의 일원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 결정들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기계는 작품에 대한 해석과 비평을 텍스트 형태로 제출하고 그 비평을 피어 리뷰를 거친 학술지에 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은 현재로서는 아직 달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4 예술가의 스타일에 대한 소개를 비평 스타일로 언어화해주는 ‘비평가 AI’ 등의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기계가 생성한 담론이 “예술적 지평”에서 다른 AP들을 설득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4. 기계-인간 양원제
앞 절에서 나는 기계가 AA와 AP가 될 자격을 갖출 수 있음을 논했다. 인간 집단은 기계가 AA로서 예술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차단할 수는 있지만, 기계가 스스로의 신원을 숨기고 AP로서 공론장의 형성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계가 실제로 AA 또는 AP로서 인간과 동등한 행위력을 발휘할 정도로 발달하기 전에 예술세계에 속한 기계의 위치와 기계-인간 관계의 양상을 미리 구상할 필요가 있다. 기계를 예술세계에서 완전히 배제할 경우 기계가 예술세계에 미칠 수 있는 가능한 긍정적 효과를 무시 또는 배제할 뿐 아니라 지금도 예술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과 기계의 협업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기계를 예술세계 내에서 인간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상정할 경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기계가 산출해 버리는 예술세계의 ‘인간 소외’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중도적인 입장으로서 기계에게 예술세계에의 접근을 허용하되 제한적인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지도(supervision)를 거쳐서만 예술세계의 공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체제를 제안한다.
4.1. 정치체제와의 유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는 운영 정관이 있지만,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예술세계에는 실체가 없다. 모든 예술가가 가입해야 하는 세계 예술가 협회 같은 것은 없으며, 있다고 해도 임의의 AA나 AP가 그 협회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술세계 내 인간-기계의 관계를 정의하고 각 행위자들이 그 정의에 따르도록 규율할 수 있을 것인가? 협회가 없으면 만들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예술인패스’ 제도는 예술활동 증명 등의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신청자에게 예술 감상 등의 비용을 지원하는 식으로 예술인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제도는 AA또는 AP임 그 자체를 증명하는 절차는 아닌데, 그럼에도 국가의 관리 안에 있고 국가에 의해 인정된 종류의 예술에만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예술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하려는 간접적 행위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법적·정치적 수단을 통해 정치경제적 권력을 예술과 연결할 경우 예술세계의 작동에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사회와 독립된 자주적 조직으로서의 예술세계가 예술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인식이 지금 예술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외부적 요인으로 강제된 방식이 아니라 지금의 예술세계의 구성원이 주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내적인 접근이 더 적절하다. 전 세계 예술인 협회는 없지만, 성문화된 법이나 조직 없이도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으며 그 공동체의 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하는 담론을 예술세계 내에 ‘관습법’ 형태로 유통시킬 수는 있다. 예술세계의 구성원 사이에 AA와 AP의 조건과 권한, 그리고 예술제도 속에서 어떤 예술작품이 어떻게 전시되어야 할지에 대한 충분히 동질적인 인식이 만들어진다면 실제로 정관을 가지는 하위조직인 미술관, 아카이브, 전람회 등에서도 이 인식을 준용해 실체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과학계가 ‘세계 과학자 협회’ 없이도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연구윤리를 자발적으로 규율해 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사회세계(social world)의 구성원들이 명성·권력·자본을 불문하는 어떤 자원을 두고 경쟁할 때, 구성원 간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정치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분석을 준용할 수 있다. 예술세계의 작동 방식이 민주주의적인지 아니면 권위주의적인지, 예술세계 내의 논쟁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게임의 규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불필요한 혼란을 줄이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성립에 기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예술세계는 여성 예술가의 등장,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한 구상예술의 혼란, 팝아트의 등장 등에 계속해서 유연하게 반응하며 그 ‘게임의 규칙’을 바꾸어 왔다. (Ivanova 2025) 기계 AA/AP의 등장은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인간에 한정되어 왔던 AA/AP의 범위를 확장해야 하기 때문에 기존 예술세계의 변천보다 더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여겨진다. 충분히 발달한 기계가 예술세계의 시민권 조건을 충족했을 때 기계에게 어떤 시민권을 부여할지의 문제는 곧 인간과 기계가 예술세계에서 가질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다.
인간과 기계가 1개체 1표, 숙의, 투표로 작동하는 완전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다. 자신을 복제하고 조금씩 변화시키는 데에 유능한 기계는 손쉬운 증식을 통해 공론장의 대부분을 독점할 수 있다. 이같은 기계의 특징은 투표 기반 민주주의뿐 아니라 토론을 거쳐 공동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 역시 차단한다. 기계 AP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비평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춘 경우, 대상 X의 예술세계 편입 가능성을 논의하는 숙의의 장에서 인간 AP의 대응 및 반론 속도가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예술을 생산 및 소비할 수 있는 기계 AA/AP의 등장은 인간이 만들어 온 예술세계를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예술 전통을 형성·주도함으로써 예술세계를 인간의 이해로부터 탈취할 가능성이 있다. 예술세계의 주도권을 인간이 수호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질 필요가 있다. 이에 나는 예술세계 내에서 ‘기계의 공론장’과 ‘인간의 공론장’을 이원화해 후자가 전자를 감독하고 승인하는 양원제 구도를 예술세계의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습법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4.2. 기계 하원과 인간 상원
예술 여부를 공인하는 예술세계의 작동은 AA의 작품 생산 → AP로 구성된 예술세계의 심의 및 선별 → AP로 구성된 예술세계의 전시 관람 → 변형된 예술 관념에 준거한 AA의 작품 생산의 순환으로 이루어진다. 최종적으로 예술의 ‘공인’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이 중 두 번째 단계인 예술제도의 심의 과정이다. 기계가 AP로 예술 심의에 참여할 경우, 앞서 살펴본 이유로 기계의 의견이 인간의 의견과 동등하게 취급되기는 어렵다. 대신 기계가 예술세계가 기여할 수 있는 예술 심사 튜링 테스트나 설명적 비평 제공 등의 장점은 ‘양원제’ 내의 상원에 위치한 인간 AP가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계는 기존 예술세계에 등록되어 있는 작품을 학습하고 이에 따라 ‘작품 후보’들을 조망해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거쳐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는 후보군을 추린다. 하원은 예술세계에서 작품들 간의 연관도를 산출하는 일종의 거리 함수(distance function)를 점수화해서, 각 후보 작품의 기존 예술과의 연관도 점수와 함께 왜 이 작품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평적 이유를 상원에 제출한다. 이 작품의 제작자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인간과 기계의 협업 결과인지는 기계들이 내리는 평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만약 기계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경우(그 이유는 인공지능의 모델 차이일 수도, 학습 데이터의 차이일 수도 있다), 기계들 간의 조정과 타협을 거친 최종안을 상원에 상정한다. 인간 상원은 기계가 제출한 답변과 인간 AP가 추가적으로 제출한 답변을 조합해 인간들끼리의 숙의를 거쳐 예술제도에 전시될 작품을 선별한다.
현재 프로바둑 텔레비전의 코멘터리가 진행되는 방식이 내가 구상하는 양원제와 유사하다. 기사들이 일종의 바둑의 행위자(Go Agent, GA)라고 하고, 대국을 중계하는 캐스터들, 승률 예측 인공지능 프로그램, 바둑을 관람하는 대중을 바둑의 수용자(Go Patient, GP)라고 하자. 모든 인간 GP들에게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각 기사의 승률이 실시간으로 제시된다. 인간 GP들은 기사들의 각 수와 그에 대한 인공지능 GP의 예측 승률을 모두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의견을 교류하고 다음 수를 제안한다. 물론 이것이 GA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나의 예술세계 양원제 구상과 차이가 있지만, GA 기사들은 경기가 끝난 뒤 대국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GP들의 의견까지 참조하여 바둑의 전략과 ‘바둑이란 무엇인지’의 관념을 조금씩 교정하면서 다음 대국에 임하며 바둑을 ‘생산’한다. 이 ‘바둑세계’ 작동의 순환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중계자는 모두 GP이지만, 기계와 인간 사이에 대등한 논쟁이나 의견 교류가 이루어지기보다는 기계가 먼저 제시한 결과를 인간이 다시금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두 단계의 심의가 이루어진다.
5. 가능한 반론에 대응
물론 아직 기계가 AA와 AP로서 적극적으로 행위하기 어려운 단계에 있으므로 기계와 인간의 예술세계 양원제는 실제로 적용을 논의할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제시한 가상적 안에는 이론적 차원에서 두 가지 반박이 제기될 수 있고 이는 대답을 요한다. 한 가지 방향은 양원제 조건이 기계에게 너무 강하게 제약적이라는 비판이고, 또 다른 한 방향은 반대로 양원제가 기계에게 너무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 예술세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두 가지 비판에 모두 대응하면서 나는 양원제가 양쪽 극단으로 빠지지 않는 중도적·포괄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1. 이등 시민에 불과한 기계?
내가 제시한 방식의 양원제는 로봇이 아무리 정교한 논증을 통해 예술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더라도, 그리고 얼마나 오랜 기간 그 설명을 상원에 제출하더라도, 인간으로 구성된 상원이 기각하는 한 예술세계에 해당 작품을 등록시키지 못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기계가 자의식을 가지고 인간과 구별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인간성’을 습득할 경우 양원제의 계급구조가 기계를 영원히 인간의 목적에 복종하는 하위 존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발생할 수 있다. 기계에게 예술세계의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해 놓고 인간의 결정에 저항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아무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양원제 예술세계에서 기계가 인간과 동등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 유효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그것으로 기계의 역할을 충분히 다할 수 있다고 본다. 어린이, 환자, 전과자, 군인, 공무원 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선거권·피선거권·신체의 자유·정치활동의 자유 등 특정한 권리를 제한받는 사례는 예술세계 바깥의 인간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현재의 예술세계에서 예술을 평가함에 있어 AP들 사이에 권력이 동등하지 않게 배분되어 있음도 지적되어야 한다. 유명 비평가, 학계에서 테뉴어를 받은 미학자, 수상 작가 등의 의견에 예술세계를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예술세계가 AP들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없음은 기계 AP와 인간 AP의 권한의 차등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예술세계에서 기계의 역할이 ‘이등시민’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옳지만, 양원제를 기각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브라이슨(Joanna J. Bryson)은 기계가 도덕적 능동자/수동자로서 작동할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로봇은 노예여야 한다”(Robots should be slaves)라고 주장한다. (Bryson 2009) 그에 따르면 인간을 ‘노예’로 비인간함으로써 기본적 인권을 박탈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애초에 비인간인 로봇을 소유물인 ‘노예’로 간주하는 것은 정당하다. 제한된 계산력과 관계맺기 역량을 가진 인간이 비인간에게도 인간과 같은 종류와 강도의 관계맺음을 시도한다면 역설적으로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의 도덕성이 희석될 수 있다는 브라이슨의 논증은 예술세계에서 예술 여부를 판정하는 것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적 차등을 제도 속에 분명히 자리잡게 하고, 기계가 산출한 답변의 책임을 상원인 인간 집단에 분명히 귀속시킴으로써 예술세계는 기계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수반하는 교감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예술적 참여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다.
5.2. 기계들만의 독자적 예술 플랫폼 가능성?
또 다른 가능한 반론은 예술세계에 소속된 AA로서의 기계가 스스로 예술을 생산하는 기계들만의 커뮤니티를 생성하고 자가증식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생산·향유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킬 가능성이다. 이는 최근의 NFT 시장이나 AI Art 들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이 조망할 수 없는 스케일로 기계가 양산하는 작품들이 일으키는 실체적인 위협이다. 가령 음성 파일로 된 재생 시간 1000년의 반복 없는 교향곡, 인간의 시각으로 구분할 수 없는 미세한 RGB 값의 변화로 만든 회화, 5차원 가상공간에서 만들어 낸 조각 작품, 인간이 한눈에 조망할 수 없는 크기의 크기로 된 복잡한 이미지 등을 AI가 만들어낼 가능성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이 ‘작품’들이 인간 상원의 승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기계 하원이 독자적으로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기계예술 플랫폼’을 인터넷상에 만들고 각자의 예술을 업로드하여 기계 AP가 평가하는 식의 자율적 기계 예술세계의 발전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기계 예술세계의 산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기계들만의 독자적 커뮤니티가 기계예술을 양산하고 기계만의 예술세계를 운용할 경우 그 세계에 인간이 개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즉 인간이 참여 가능한 예술세계1과 기계만이 참여 가능한 예술세계2의 단절이 일어날 경우 예술세계2에서 생산하는 작품들의 자율성은 존중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술세계1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예술로 인정할 수는 없는데, 예술세계2의 산물은 인간 상원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술세계2에서 고도화된 예술이 인간 AA와의 협업 또는 인간 AP에 대한 전시를 희망할 경우 결국은 예술세계1의 인간 상원에서 설득과 심의가 이루어져 충분히 예술세계1 내에서 맥락화된 후에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예술이 인간의 예술세계를 잠식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코켈버그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기계의 창의성이나 기계의 예술성을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는 인간의 예술적 의도에 별다른 이유 없이 높은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편향이 상존할 필요는 없다고 보면서, “창의성의 다른, 비인간 형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제안한다. (Coeckelbergh 2017: 298) 그러나 앞서 2.2절에서 살펴보았듯, 기계만의 창의성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기계의 산물이 인간 예술세계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이 개입하고 형성하는 예술세계1에서만 인간의 최종 심의가 이루어진다면, 예술세계1과 2가 각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변화하고 협력하는 일종의 리그제로 정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기계와 인간 중 어느 쪽도 과도하게 소외되지 않으면서 협력적이고 다채로운 예술세계들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
6. 결론
이 글에서 나는 기계와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각 존재들이 자율성과 협력 가능성을 모두 보장받으며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인간 예술세계에서의 기계-인간 양원제 의사결정 방식 도입을 제안했다. 양원제에서 기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승인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이등 시민’으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이는 오히려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분명히 함으로써 인간의 예술세계가 혼란에 빠지거나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물론 나의 제안이 강제성을 가지는 법령이나 정관으로 정착될 수는 없는데, 예술세계는 명시적인 규칙에 기반해 작동하지 않는 관습 기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기준을 나누고 기계에게 예술을 생산하거나 해석하는 권한을 부여할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토론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예술세계가 관습에 기반해 작동하는 유연한 공동체라는 점은 오히려 예술의 정의에 대한 주제를 발화하고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한다. 철학은 예술세계의 작동 방식을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지만, 예술세계 내에 예술 수용 방식에 대한 담론을 유통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예술을 이해하는 방식을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정치 등의 예술 바깥 영역의 논리로 강압하는 식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예술세계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지속 가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어떻게 예술세계를 구성하는지 계속해서 의견을 제출하고 예술세계 내 토론이 활발히 일어날 필요가 있다. 비평, 안내, 해석, 의도 등의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 예술적 숙의의 텍스트들은 결국 예술 외의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타자를 설득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그러므로 예술세계의 자율성·유연성·지속성은 오직 계속되는 예술철학만에 의해 담보된다. 기계와 인간의 양원제는 그 일환으로서 예술세계에 내가 제출하는, 그리고 논의를 통해 얼마든지 구체화될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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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eckelbergh, M., 2017, “Can Machines Create Art?” Philosophy & Technology 30, no. 3, 285–303.
Danto, A. C., 1973, “The Last Work of Art; Artwork and Real Things.” (국역: 윤자정 옮김, 1987, “최후의 예술작품: 예술작품과 실제사물.” 『현대미술비평 30선』, 중앙일보사 )
Dickie, G., 1997, Introduction to Aesthetics; An Analytic Approa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vanova, M., 2025, “AI, Art and Morality.” AI and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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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cker, R., 2010, Aesthetics and the Philosophy of Art: An Introduction. Second edition. Elements of Philosophy. Lanham Boulder New York Toronto Plymouth: Rowman & Littlefield.
주
- Artworld의 역어는 ‘예술계’와 ‘예술세계’가 주로 사용된다. 통상 ‘예술계’라고 하면 ‘재계’ ‘정계’처럼 인간 행위자들의 집합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작품, 언론, 청중 등을 모두 포함한다는 포괄적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예술세계’를 사용하기로 한다. ↩︎
- 각 연결이 논리적인 연쇄관계일 필요는 없다. 큐비즘에 ‘반대’하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특정 작품이 큐비즘과 연결될 수도 있다. ↩︎
- 예술계 시스템을 이루는 나머지 한 요소인 ‘예술작품’은 기계의 개입에 따라 흥미로운 쟁점이 될 수 있다. 기계가 예술가/공중이면서 동시에 예술작품일 수 있을까? 디키의 첫 번째 규정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인공물’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지만 기계는 동시에 예술의 창조자이면서 피조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듯, 학술지 통과와 출판 가능성을 완벽하게 판정할 수 있는 전문성의 구획 기준은 없다. 이 점에서 기계의 예술 해석에 요구되는 ‘설명’의 수준에 대한 기준 역시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